반쎄오를 먹은 다음 날 간 곳은 벤탄시장 근처에 있는 벱미인bep me in이라는 식당이었다. 베트남 여행을 시작하며 슬슬 한국어가 들려온다고 생각하다가 이 식당에서 깨달았다. 베트남은 한국인이 정말 많이 오는구나. 그래서 무비자가 15일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나는 베트남에서 출국하고 여권의 출국도장을 확인할 때만 해도 베트남 무비자가 15일인지 몰랐다. 그저 다른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처럼 무비자 90일인 줄 알고 넉넉히 11일을 여행했는데 세상에 출국 도장옆의 베트남 입국 도장의 언제언제까지 머무를 수 있다는 표시의 날짜가 내 출국 날짜와 가까워서 다시 보니 무비자가 15일이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여유롭게 여행했으면 불법체류자가 될 뻔 했다.
벤탄시장은 딱히 표지판같은 것은 없고, 오고가다가 골목길에 사진 속 아주 작은 간판이 붙어있는 걸 발견해야 한다. 처음엔 분명 구글맵스엔 위치가 여기라고 나오는데 도저히 식당같은 게 보이지 않아 조금 헤맸다. 안쪽으로 걸어들어가며 표지판을 따라가니 식당이 나왔다. 2층과 야외테이블까지 있는 식당이었는데 1시 반이 조금 넘어 도착했더니 식당은 꽉차있고 한국인 단체에서 온 사람들까지 있었고 웨이팅까지 있었다. 이렇게 줄을 많이 서는 유명한 맛집인 줄 모르고 가기도 했고 웬만했으면 다른 곳에 갔을 텐데, 배가 너무 고픈 상태여서 그 더운 날씨에 웨이팅줄을 섰다. 혼자여서 자리를 잡는 데 오래 걸리진 않았고 한국인 단체관광객이 없던 2층으로 안내받았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록 그 자리가 장롱에 붙어있는 것 같은 작은 선반의 느낌이었더라도 말이다. 앉자마자 카페쓰어다와 망고스무디를 주문했다. 카페쓰어다는 정말 아름다운 맛이 나는 베트남의 연유 커피다. 동남아에서 호텔에서 먹고 쉬려다가, 태국의 왕궁에 충격받아 열심히 돌아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가, 베트남에 와서 또한번 새로 알게 된 세계가 동남아의 연유커피였다. 진한 홍차에 설탕과 연유를 때려넣은 말레이시아의 떼따릭도 충분히 맛있었고 그래서 인스턴트 떼따릭도 샀지만 베트남의 연유커피는 그것과 다른 솔직한 매력이 있었다. 카페는 커피, 쓰어는 연유, 다는 아이스를 뜻한다. 뜨거운 연유커피는 카페쓰어농이라고 한다. 찌인한 커피에 연유를 마구 붓고 얼음도 잔뜩 넣은 카페쓰어다는, 베트남이 커피생산량 2위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맛이었다. 라떼는, 특히 한국에서 먹는 라떼는 양이 너무 많아서 호주의 플랫화이트를 사랑했던건데 베트남의 카페쓰어다는 아예 우유가 아닌 연유가 들어갔으니 훨씬 농밀하고 진했다. 방금 농밀하다를 국어사전에 쳐봤더니 짙고 빽빽하다라고 나오는데, 딱 이 말이 맞다. 짙고 빽빽한 맛.
두 음료부터 시킨다음, 월남쌈fresh roll(Gỏi cuốn)과 춘권spring roll(Chả giò)을 시켰다. 베트남의 월남쌈은 저 조금 튀어나온 파가 아주 귀여운 특징이자 디스플레이다. 오이와 파, 소고기에 폭신폭신한 쌀국수가 잔뜩 들어갔다. 느억맘을 잔뜩 올려 먹는다. 베트남의 춘권은 라이스페이퍼를 써서 특히나 더 바삭바삭하다.
망고 스무디, 45k동.
카페쓰어다, 40k동.
월남쌈, 75k동.
춘권, 85k동.
한국인을 비롯한 관광객이 너무나 많았지만 월남쌈은 정말 맛있었으므로, 혹시 가게 된다면 점심시간 피크타임은 피해가길.
이 식당에서 1키로 정도 떨어진 곳에 사이공 노트르담 성당이 있다. 이름과 생김새에서부터 잘 알수 있듯 프랑스 식민지 시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주황색 벽돌에 파란 별, 마리아 상이 멋진 성당이지만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질리도록 봤고 심지어 공사중이어서 감흥이 없었다.
처음 베트남에 대해 알아볼 때 다낭의 오행산을 빼면 절이나 사원은 딱히 없다는 게 신기했다. 베트남에서 로마카톨릭이 전체 인구의 약 7%인데, 한국의 가톨릭 비율이 약 8%인 걸 생각하면 예상외로 가톨릭 비율이 높은 편이다. 베트남 민족 종교를 믿거나 무교인 사람이 70%가 넘고 그 다음이 불교(12.2%), 천주교 순이다. 그래서 베트남에선 건축물은 많이 못 본 것 같다. 아쉬울 뻔 했지만 대신 커피에 빠져버렸다. 카페쓰어다의 달콤한 첫맛과 쌉싸래한 뒷맛. 아이스커피가 맛있다는 말은, 뜨겁게 먹었을 땐 더더욱 맛있다는 뜻이다. 하늘 흐린 하노이에서 카페쓰어농을 처음 마셨을 때는 얼마나 행복하던지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 노트르담 성당의 바로 옆에 사이공 중앙 우체국이 있다. 멀리 베트남 국기가 보인다. 새빨간 배경에 노란색 별 하나. 중국보다도 더 공산주의국가같은 깃발이다. 호이안 올드타운의 샛노랑이 떠오르는 노란색 아주 예쁜 건물엔 흰 셔츠에 빨간색 리본을 하고 현장체험을 오는 학생들이 많았다. 깜찍한 외부에 비해 내부는 평범했다. 정가운데 대문짝만한 호치민 초상화를 빼면.
여기서 엽서를 많이 쓴다기에 엄마아빠에게 한 장, 친구들에게 한 장 씩 써서 날려보냈다. 2주는 걸릴 줄 알았는데 일주일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고 해서 놀랐었다. 세 장이나 엽서를 쓰려면 보통의 기운이 있어서는 안 된다. 웬만큼은 보고싶고 그리워 했었어야지 그 정도의 편지를 쓸 수 있다.
언젠가 호텔 프론트에서 받아온 관광 안내지도에, 당장 보고싶은 것들을 적어본 적이 있다. 오랜 친구의 짧은 손가락이나 주근깨, 공항버스에 태워보내던 엄마 얼굴, 출국 전날 먹은 복어튀김, 잊지 말라고(뭐를?) 사주는 거라던 아빠의 말 같은 것들. 분명 놀라운 것들을 보는 하루하루였지만 왜인지 써내려가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래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하나보다. 여기에 있으면 저게 보고싶고, 저걸 보고있으면 다시 그게 그립고.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사람은 한눈팔지 말고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것 같다. 어느 영화처럼 과거는 어쩔 수 없고 어느 책처럼 미래는 알 수 없으니까. 지금 당장에 몰입하고 충실해야 후회가 없고 후회해도 금방 회복이 가능하다. 그런데 그게 어렵다. 멋진 여행지에서도 가끔은 한국을 생각했던 것처럼. 정확히는 한국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 거지만.
예컨대 도로의 한 두 차선을 차지하고 질주하는 베트남의 오토바이처럼 현재를 살아야 한다. 당장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있는 것에 집중해야 어리바리한 관광객을 치지 않을 수 있을테니까. 혹시나 횡단보도 없는 곳에서(횡단보도가 있는 곳이라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오토바이행렬을 어떻게 끊고 길을 건너야 하나 싶지만 일단 건너면 된다. 나름 멀리서 오토바이가 달려온다 싶을 때 길을 건너기 시작하면 오토바이가 절대 멈추지는 않고, 그냥 속도가 약간 늦춰진다. 그때 재빨리 건너면 된다. 그래도 도저히 못하겠다면 관광객 무리나 현지인이 건널 때 재빨리 따라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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