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에서의 마지막 식사였던 망고밥의 달콤함을 생각하며 도착한 호치민 시티 공항이었다. 베트남 아재들의 택시호객을 겪으며 그랩을 부르고 있던 중이었다. 막 유심을 바꿔서 껐다 켜지는 걸 기다리고 있으니 또다른 아재가 다가와서 그랩어플을 켜고 호텔 주소를 물어봤다. 말해줬더니 공항에서 호텔까지 그랩으로 나오는 비용보다 싸게 부르길래 그 아저씨 차를 타고갔다. 그리고 공항세로 1달러를 내야 한다고 했는데 1달러 짜리가 없어서 한국돈 천원을 줬다. 지금 찾아보니 공항세는 10,000동 약 500원이라고 나온다. 이땐 몰랐지만 시작부터 오백원 사기를 당한 것인가. 하지만 택시비가 쌌으니 이해하기로 한다.
한국돈 1,000원은 베트남돈으로 약 20,000동.
베트남은 동전을 쓰지 않으며 화폐단위가 굉장히 높은 곳이다. 게다가 지폐 모델이 전부 호치민 일방통행이라 헷갈리기가 쉽다. 그래도 한국돈으로 바꿔 생각하기는 간단한데 0을 하나 빼고(자릿수 하나 제거), 전체를 2로 나누고 대한민국 원을 붙이면 된다. 그러니까 10,000동에서 0을 하나 빼면 1,000이고, 이걸 2로 나누면 500. 여기에 대한민국 원을 붙여 500원이 된다. 표기법도 다른 부분이 있는데, 이렇게 화폐단위가 크다보니 뒤의 0 세개를 떼버린다. 이 000대신 k를 쓴다. k는 1,000을 말한다. 1km을 생각하면 쉽다. 1km=1,000m. 90,000동은 보통 메뉴판에 90k라고 쓰고 어떤 곳은 아예 이 k도 빼고 달랑 90이라고 써놓기도 한다.
이 사기꾼(추정) 아저씨와 탄 차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미니밴이었다. 마네키네코를 닮은 장식품을 보며 구글 번역기로 대화를 하다가 시내로 진입하고 마주한 오토바이 행렬에 대화가 끊겼다. 베트남에서 오토바이를 많이 탄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이렇게 무질서할 줄은 몰랐다. 베트남 사람들이 어떻게 삼십살 넘게 살 수 있는지 궁금했다. 차선 하나를 잔뜩 차지하고 있는 오토바이 떼와, 일부 오토바이들의 뻔뻔한 역주행과 그걸 그저 빵빵대고 말고 아무도 그 빵빵을 신경쓰지 않는 걸 보는 게 너무 이상하고 이 도로에 나도 있으니 걱정도 되고 비현실적이라 웃음이 났다. 안전하냐고 물었을 때 사기꾼(추정) 아저씨는 오 하지만 다들 안전히 운전하고 조심하기 때문에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고 했지만 못미더웠다. 당장 첫 날 도로를 건널 때에도 끊임없이 몰려오는 오토바이 떼에 오늘 여기서 오토바이에 깔려 죽는 건지 생각했었다.
베트남의 수도는 하노이이고, 공항은 각 주요 도시마다 한 개 씩 있다. 주요 도시라 함은 북부의 하노이와 중부의 다낭, 남부의 호치민 시티다. 호치민 시티는 다른말로 하면 사이공. 호치민 시티의 공항 코드도 사이공에서 따온 SGN이다. 원래 사이공이란 이름을 가진 지역은 남중국해를 따라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남동쪽 끝부분을 말했다. 그러다 베트남전의 종전이후 남북의 통합을 축하하며 사이공과 그 주변 지역을 호치민 시티로 다시 이름짓게 됐다. 이름은 당연히 베트남의 남성 공산주의 정치가인 호치민Ho Chi Minh에서 따왔다. 현대 베트남의 국부 쯤 된다. 이 호치민이 중심이 되어 베트남은 1945년에 동남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고 지금도 그렇다. 다만 자본주의의 달콤한 돈맛을 아주 많이 알아버렸을 뿐이다.
사회주의 국가이거나 사회주의와 다른 것들을 쓰까먹은 국가는 지금도 여럿 있는 편인데, 이 중에서도 마르크스-레닌 주의인 국가들을 보통 공산국가라고 부른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이 없지만 사회주의는 사유재산이 있긴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socialism는 정치개념이고 공산주의communism는 경제개념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간단하다. 정확히는 마르크스가 말하길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가 사회주의라고 했지만 기자들도 제대로 구분하지 않는 마당에 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심지어 지금 공산주의 국가라고 하는 것들도 자기들 사회체제가 뭔지 한 마디로 정의하지 못할 것 같이 이것저것 섞어먹은 것 같던걸.
지금 보통 공산주의 국가라고 한다면 베트남, 중국, 쿠바, 라오스가 있다. 북한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니니까 공산국가가 아니다. 여기서 뭔가 헷갈리기 시작하는데 베트남은 사유재산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중국도. 게다가 쿠바도 최근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헌법 개정안을 가결했다. 이런 애들을 보고 자본주의적 경제체제가 혼용되는 공산주의 국가라는 표현을 쓴다. 같은 표현으로는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 샷 뺀 아메리카노, 캬라멜 시럽 뺀 캬라멜 마끼아또 등이 있다.
사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는 국가가 없어야 한다고 했으니 한 나라가 공산주의 국가라는 것 자체가 그냥 사회주의 국가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현실에서 몰락했을 뿐인 개념을 굳이 머리아프게 공부하려 들지 말자. 마르크스도 본인 입으로 자기는 마르크스 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 중요한 건 내가 돈내고 갈 수 있는 나라냐 아니냐 거기에 볼게 있냐 없냐 이거지.
사진은 하노이 오페라 하우스의 작은 버전인 호치민 시립 극장이다.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와 닮게 지어졌다. 베트남은 1887년부터 시작해서, 제2차 세계대전 때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이 점령했던 걸 제외하면 1954년까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영국에게 인도를 잃은(?) 프랑스는 중국과 가까운 지역을 원했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진 후 그들의 망한 군대 평판을 되살리고 싶어했다.
베트남은 1년에 벼농사를 3번이나 지을 수 있다. 정확히는 북부가 2기작, 남부가 3기작을 짓는다. 참고로, 2모작은 다른 작물을 1번 씩 심는 것이고, 같은 작물을 두 번 심는 건 2기작이다. 이것만 읽어도 베트남이 왜 쌀국수를 먹기 시작했는지 자연히 이해가 된다. 봄에 비가 오지 않고 겨울이 추워 밭농사를 1모작하는 한국도 쌀농사를 2모작하는 일본도 쌀에 미쳐있는데 베트남은 1년에 쌀이 3번 난다니. 베트남은 지금도 최대 쌀 수출국이다.
이런 베트남과 프랑스가 (강제로) 만나 생긴 것이 반미banh mi 샌드위치다. 뭔가 참으로 미국을 싫어할 것 같은 이름. 프랑스에서 전해진 바게트에 쌀가루를 넣어 만든 빵에 여러가지 재료를 채워넣은 샌드위치다. 보통은 반미 샌드위치라고 써있지 않고 그냥 빵이나 샌드위치라고 써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도 반미 샌드위치다. 식빵이 아니라 바게트빵이 나온다. 하지만 누구도 이걸 프랑스 요리나 퓨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식민지 출신 요리면서도 이건 완전히 베트남 요리다. 반미 샌드위치는 먹을 때마다 이 점이 떠오른다.
샌드위치 앞에 반미가 붙어서, 엘비스 프레슬리 샌드위치나 BLT샌드위치처럼 정해진 재료라던지 만드는 방식의 정석이 있을 것 같지만 현지인들에겐 그냥 샌드위치일 뿐이다. 보통은 오이, 무, 당근, 고수에 소고기나 닭고기를 주로 넣는다. 다낭에서 먹었던 반미엔 계란부침이, 하노이에서 먹었던 반미는 감자튀김이 들어있었다. 완전히 셰프와 그날의 재료 수급 나름. 쌀가루를 넣은 바삭한 바게트빵은 가볍고 쫄깃쫄깃하다. 안에 뭐가 들어갔든, 맛있을 것이다. 베트남에 있었던 11일 동안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특히 하노이 길거리 노상에서 먹었던 계란부침에 고기젤리 들어간 반미는 지금 생각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첫날은 반미 샌드위치 두 개를 먹고 내리 잤다. 다음날 베트남 퓨전 식당이라고 써있던 일레븐eleven 이란 곳에 갔었다. 망고주스는 그저 그랬고, 첫 번째 사진의 씨푸드&애플 스프링 롤은 맛있었지만 기억에 잘 남지 않았다. 두 번째 사진의 반쎄오가 너무 맛있었기 때문이다. 반쎄오는 쌀가루와 달걀, 코코넛 밀크, 심황가루를 반죽해 얇게 부친 계란 지단에 다진 고기와 숙주, 새우를 넣고 반을 접은 고기요리다. 라이스페이퍼에 같이 나오는 채소와 달걀부침을 올리고, 생선을 발효시킨 소스인 느억맘을 찍어서 먹는다. 생각보다 고기가 많이 들어있고 잎채소들도 싱싱해서 식감이 재밌고 먹는 맛이 있었다. 느억맘은 발효 소스고, 생선을 발효시킨 거라서 입에 안 맞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 없이 듬뿍 찍어 먹었다.
배터지게 먹고서는 대각선에 있는 fruit box라는 과일가게에서 체리주스를 마셨다. 체리를 일일이 까서 갈아 만드는 거라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지만 체리 말고 다른 재료는 들어가지 않아서 정말 진하고 맛있다. 심지어 향긋한 느낌. 주스만 사서 나오려고 했는데, 주스 만드는 동안 가게를 둘러보자니 과일들이 전부 싱싱하고 맛있어 보였다. 그래서 체리를 사와서 외계어같은 베트남어가 나오는 티비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잔뜩 먹었다. 내일은 호치민 시티를 둘러보고 와야지. 우체국에서 다들 엽서를 보낸다던데.
fried spring roll, 89k(89,000)동
반쎄오banh xeo, 175k(175,000)동
체리주스, 99k(99,000)동
체리 450g, 202,050동
하노이에서 하롱베이 투어를 했을 때, 가이드는 베트남이 세계의 주방으로 불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땐 베트남 여행을 끝마치던 시기였음에도 베트남 요리가 뭐 그정도인가 싶었는데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다보니 정말 그랬던 것 같다. 일단 접해보지 못했던 것들이어서 눈이 갔고 그럼에도 입맛에 꼭맞았다. 영어 잘하는 전문 서버의 반쎄오부터 매연낀 길거리의 분짜까지 어느 하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연유 든 커피부터 한국에서 참 유명한 수박주스 땡모반까지 마시면 웃음이 났다. 태국은 번쩍번쩍한 금으로 내 눈을 휘어잡고 베트남은 반미로 내 배를 터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동남아 여행 중에 가장 길게 머문게 라오스, 두번째가 베트남이었던 건 다 그런 이유가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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