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링턴에서 페리를 타고 남섬의 페리 터미널에 도착하면 뉴질랜드 관광의 중심인 남섬에 첫발을 내미는 것이다. 하지만 남섬은 북섬에서 출발한 페리 터미널에서 프란츠조셉까지 가는 4일간의 일정동안 별다른 할 거리가 없다. 그래서 키위버스는 이곳저곳 산책을 시키고 키위버스만의 경험을 주려고 하는 것 같다. 그 산책 중 하나는 팬케이크 바위이고, 키위 익스피리언스만의 경험은 레이크 마히나푸아에서의 드레스파티다.
남섬 페리 정류장은 픽톤이라는 곳에 있다. 작은 페리에는 키위버스를 태우지 않는다. 북섬에서 동고동락하던 버스와 헤어지고 남섬 픽톤의 페리정류장에서 새로운 버스에 똑같은 운전수, 그리고 몇 명 더 픽업받은 여행객들을 태우거나 내린 다음, 버스는 넬슨에 잠시 정차해서 여행객 몇 명을 더 태우거나 내리고, 아벨 타즈만에 도착한다. 키위 익스피리언스에서 정해진 일정은 아니지만 원한다면 미리 키위 익스피리언스로 이메일을 보내 픽톤이나 넬슨에 머무를 수 있다. 웨스트포트로 가는 버스에서 만난 사람 말로는 넬슨 호수가 그렇게 예쁘다고 했다. 위 사진이 넬슨호수인데 이날은 햇빛이 지나치게 쨍쨍하기도 해서 버스로 잠깐 지나치며 봐도 예쁘기는 정말 예뻤다.
웰링턴에서 아침 8시도 되기 전에 시작한 일정은 남섬의 카이테리테리라는 작은 마을에 5시 반에 도착해 끝난다. 카이테리테리가 키위 익스피리언스 일정에는 아벨 타즈만이라고 써있는데, 카이테리테리 바로 위에 아벨 타즈만 국립공원이 있다. 해변에 위치한 마을이고 동네산에 10분짜리 트랙이 있는데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뷰포인트가 좋은 곳이다. 하지만 남섬의 중심은 아름다워 왕이 반했다는 마을 퀸즈타운과 그 옆의 밀포드 사운드, 후커밸리 트레킹을 하는 마운트 쿡 빌리지 근처, 그리고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크라이스트처치이기 때문에 그 외의 지역은 관광객이 적고, 또 비행기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육로로 남섬을 관광할 때 거쳐가는 픽톤이나 아벨 타즈만, 넬슨, 웨스트포트같은 곳은 더더욱 여행객이 많이 가지 않는 곳이다.
서울 공화국인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한 나라 인구의 도시 집중에 대해서는 더 놀랄 것도 없지만, 뉴질랜드 남섬에 사는 인구를 전부 다 합쳐도 오클랜드 인구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생각하면 한국도 한국이지만 뉴질랜드 너네도 참 너네다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남섬은 관광지로서 많은 사람들의 돈을 빨아들이고 있고 북섬은 자국에서 돈을 버는 곳이니 인구만 제외한다면 잘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라가 분업이 잘 돼있다.
뉴질랜드 여행을 할 때 남섬이냐 북섬이냐 고를 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섬만 갈 정도로 남섬은 관광지역이다. 그래서 남섬으로 가는 출발점인 웰링턴에서는 키위 익스피리언스 버스에 여행객들이 넘쳐나기 시작한다. 성수기가 시작되는 11월이어도 북섬에서는 사람이 적어 옆 자리에 사람이 앉는 경우가 드물다. 그마저도 로토루아에서 많이 빠지기 때문에 조금은 썰렁하기도 한데 남섬으로 가는 날은 모든 좌석이 꽉 차고 한 두 자리 남는다.
근데 왜 남섬이 관광지일까? 그건 뉴질랜드 관광이 소비하는 것이 대개 남섬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넓고 푸른 호수와 높은 산맥, 그 산 위로 쌓인 눈들과 파랗고 높은 하늘같은 자연환경은 남섬에 있다. 처음 뉴질랜드에 대해 생각하면서 오해를 몇가지 했던건 뉴질랜드가 화창한 날씨일 거라는 것, 우유값이 쌀 거라는 것, 또 마지막으론 심심할거란 거였다. 왜 이 나라를 심심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건 그동안 했던 여행 중 자연환경이 주가 되는 여행에서는 그저 둘러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를 여행하면서 한 나라의 관광자원 중 하나가 자연이라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는 걸 알았다. 여행은 극도로 편안하거나, 극도로 과격하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사진은 로토이티 호수인데 아벨 타즈만(카이테리테리)에서 웨스트포트로 가는 길에 잠시 들러 점심을 먹는다. 수영복 입고 다이빙도 하는데 물이 너무너무 차가워서 들어가서 바로 나와야 한다.
아벨 타즈만(카이테리테리)에서 웨스트포트로 갔던 날, 키위 익스피리언스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하고 동네 산책을 하다가 말들을 만나서 풀을 뜯어 먹였다. 웨스트포트도 동네 산책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오클랜드에서야 동양인이 천지지만 뉴질랜드 여행을 하면서는 동양인을 만나기 힘들었다. 여행자 버스 중에 스트레이 버스에 동양인이 많고 키위 익스피리언스에 웨스턴이 많다는 말은 들었지만 스트레이 버스는 안 탔으니 모르겠다. 키위 익스피리언스에는 웨스턴이 많은 게 아니라 웨스턴이 대부분이다. 애초에 뉴질랜드로 배낭여행 온 동양인을 많이 못 봤다. 여행하면서 만난 동양인이라곤 렌트카를 빌려 여행하는 한국인부부나 단체관광온 중국인이 전부였다. 키위버스에서는 10일에 한 명 꼴로 아시안을 봤던 것 같다. 키위버스를 타는 건 돈을 번다거나 인기투표를 하는 중이 아니니까 동양인이 없는 곳에서 동양인이라는 게 해가 되는 일은 없다. 또 여행객들 중 많은 애들이 뉴질랜드에서 워킹홀리데이 메이커 신분이라 칭챙총 곤니찌와 하는 정신병 있는 놈도 없다. 심지어 나는 동양인, 특히 한국인이 없는 관광지를 좋아한다. 나는 한국어 간판을 보러 해외여행 가는 게 아니니까말이다. 그런 나도 한 집단에서 완벽하게 구분되는 외적 특성을 가지는 건 처음 겪어봐서 당황스러웠다. 호주에 있을 때에는 어딜 가나 동양인이 많았기 때문에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이 버스 안 고독한 동양인인 나는 웨스턴 너희들을 전부 왕따시킨다는 자세는 아니었다. 오히려 호주에서 호스텔 지박령으로 살면서 스몰톡이란 게 뭔지 알아간 다음 뉴질랜드에서 실전경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기억도 못할 이름을 묻고 인사하고 안부를 물으며 가벼운 주제로 시간을 보내고 침묵을 깨는 것 자체도 처음 해보는 일인데 영어로 해야 했으니, 키위버스 타면서 영어회화는 엄청 늘었다. 웨스턴이라고 영어를 잘한다는 병신같은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웨스턴 중에서도 특히 몇몇 나라 애들이 하는 영어는 동남아에서 듣는 영어마냥 걔네 자국어같지만, 덴마크나 네덜란드같은 나라에서 온 애들은 그냥 원어민이어서 하는 말이다. 수는 적지만 미국애도 있고 영국애도 있었다. 또 한국에서 영어를 쓸 때 인토네이션에 신경쓰면 나댄다고 생각하고 오~~ 원어민~~~ 이지랄 하면서 꼽주기 일쑤인데 여기서는 안하면 비원어민 영어가 되고 알아먹지도 못하니까 억양에 더 신경쓸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 인토네이션도 자연스럽게 학습했다.
이 스몰톡을 꼭 매일 해서 영어실력을 키워야 된다는 생각으로 했으면 당연히 몇 번 찔러보다 말았을 거 같고, 이때는 다른 무엇보다도 영어노래나 겨울왕국이나 엘렌쇼나 코난쇼나 버즈피드에서 수없이 보고들어 외운 표현들을 실제로 쓰는 게 너무 재밌었다. 여기서 어학연수같은 걸 왜 가는지 알았다. 온 천지에서 내가 아는 걸 써먹을 수 있었고 또 써야만 했다. 버즈피드에서는 술꾼인 사람이 니 인생 플랜은 뭐냐는 질문을 받자 내 계획은 이거(술) 한 잔 더 하는 거라는 말이 웃겨서 영상을 계속 보다가 외워버렸는데 그걸 그대로 웰링턴 호스텔에서 썼더니 그 이민2세인 남자아저씨가 내추럴 본 코미디언이라면서 그래서 와인을 줬던 거다. 내 말이 진짜로 웃겼다기보다는 완벽한 아시안이 이정도의 영어를 하는 것만으로도 놀라버리는 거라 짜증나긴 하지만 그 스파클링 와인은 너무 맛있어서 그 이후로 칵테일과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약간은 고맙다.
처음에는 스몰톡 하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는데 저렇게 아는 거 써먹다보니 재밌었다. 재밌어서 하다보니 외운 문장이 아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덴마크 애한테는 뭔 얘기를 했더라. 한국에 덴마크 우유가 있는데 비싸고 맛있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갈수록 스몰톡하는 재미를 붙이니까 그것도 키위 익스피리언스가 갖는 매력이라고 느꼈다. 키위 익스피리언스를 타면 마타키타키 matakitaki 강같이 새파란 강을 지날 때에는 사진스팟이라면서 버스를 천천히 몰기도 한다. 관광버스니까 사람들은 친해지려고 노력하고, 버스기사는 이름을 외우려고 하고, 단체사진 찍고, 노래도 틀고. 근데 만약 동양인 여행객이 영어노래를 잘 모르는데 버스 안에서 wonderwall이나 sweet caroline이나 vogue 나올 때 떼창을 하고 발을 구르면 그건 좀 외롭지도 않을까 싶다.
웨스트포트에서 그레이마우스에 들리고 최종적으로는 마히나푸아 호수에 가는 날 아침엔 바다표범을 볼 수 있는 타우랑가 베이에서 45분 동안 언덕길을 산책한다. 산책길 내내 바다표범이 보이는 게 아니라 산책길이 거의 끝나는 곳에 뷰포인트가 있다. 처음에는 보호색때문에 뭘 보고있는거지 싶지만 가만히 바위 위를 보고있으면 검은색 덩어리들이 팔락대는 게 보인다. 멀리 위에서 내려다보는거라 조막만하게 보이지만 어느 하나가 움직이면 모여있는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니 충분히 볼 수 있다. 바다표범은 카이코우라에서 픽톤으로 가는 길이나 딥사우스 패스인 더니든에서 인버카길 가는 길에서 볼 수 있다.
타우랑가 베이에서 산책을 마치고, 전날 웨스트포트에서 서핑을 신청하고 아침서핑을 한 애들을 기다렸다가 픽업하고 한시간 동안 달려 도착하는 곳은 팬케이크 바위다. 사진에 겹겹이 쌓인 바위들이 팬케이크 같다고 팬케이크 바위다. 베이오브아일랜드부터 커피이름까지 여전히 솔직한 네이밍 센스를 보여주고 있다. 계속 팬케이크, 팬케이크 거리다보면 주말 11시 쯤에 도톰한 거 세 장 쯤 구워 사이사이에 버터를 펴바르고 위에는 메이플시럽을 잔뜩 올려 차 한잔하고 먹고싶어진다. 팬케이크를 실제로 저렇게 만들기는 어렵다. 요리는 곧잘 하는데 팬케이크에 엄청난 자신은 없다. 팬케이크를 잘 구우려면 팬에 기름이 묻은건지 만건지 싶은 정도로 기름을 묻히고 약불에 잘 구워서 한번에 뒤집어야 한다. 서핑처럼 이론은 아는데 하는 건 좀처럼 잘 안 된다.
팬케이크 바위도 45분 돌아보면 끝난다. 다시 버스로 돌아와 달리다보면 그레이마우스에 도착한다. 그레이마우스와 크라이스트처치에는 횡단열차가 있다. 유명한 트랜즈알파인 열차인데 나도 탈까 고민했지만 크라이스트처치는 지진나서 한참 복구중이고, 그레이마우스도 그저 역 하나 있는 촌구석일 뿐인데다가 버스를 타다보면 기차까지는 탈 마음이 없어진다. 그레이마우스에서 그날 레이크 마히나푸아에서 있을 드레스파티를 위해 코스튬을 준비할 시간을 주고 또 몇명이 픽업받아 버스에 올라타거나 몇명은 짐을 내려 헤어진다.
다시 버스에 올라타 그레이마우스에서 마히나푸아 호수에 도착하면 짐을 풀고, 그린스톤을 만드는 액티비티를 신청한 사람들은 20달러짜리 그린스톤을 만든다. 그린스톤도 마오리 문화 중에 하나인데 마오리어로는 포우나무 pounamu 라고 한다. 웰링턴 박물관인 테파파에 전시돼있기도 하다. 나도 하나 조각해서 목걸이로 만들었는데 무조건 많이 깎아서 가볍게 만드는 게 제일 좋다. 저녁 7시 쯤에 로스트비프가 메인인 뷔페식 식사를 하고 마히나푸아 호수에서 시간 좀 때우다가 드레스파티를 하고 술도 마시고 그런다. 드레스파티는 웃기게 차려입고 술마시고 노는 걸 말한다. 물론 안하고 일찍 자도 되는데 시끄러워서 잠자기는 좀 힘들지 않을까 싶다.
초콜릿 맛이 나는 보드카같은 걸 마셨는데 말레이시아 남자애가 있어서 말레이시아에 대해서 물어봤었다. 이때 나는 동남아라는 곳에 대해 아는 게 단 하나도 없어서 동남아 애들을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이 남자애는 말레이시아를 싫어하는 말레이시안이었는데 내가 싱가폴 카야토스트 얘기를 하니까 자기가 말레이시아는 정말 싫어하지만 딱 한 가지 좋은 게 있다면 그건 음식이라면서 말레이시아 음식 얘기를 했다. 뉴질랜드 여행을 끝내고 이 말이 생각나서 검색해봤는데 싱가폴은 그냥 호주처럼 비싸기도 했고 난 말레이시아 사람이고 말레이시아가 싫지만 음식만은 좋다는 말이 웃겨서 싱가폴 말고 말레이시아에 갔다. 호주나 뉴질랜드 말고 완전히 새로운 곳에 가보고 싶기도 했다. 아빠는 본인 생각에 안전한 홍콩이나 싱가폴 며칠 쉬다 오면 어떻냐고 물어본 것 뿐이었지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마히나푸아 호수 다음은 드디어 프란츠 조셉이다. 드디어 빙하를 보러 간다. 날씨가 도와줄까? 북섬에서 남섬으로 오는 동안 이미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은 되돌아갈 때를 기약해야 했다. 빙하만은 계획한 날짜에 볼 수 있길 바랬다. 그리고 나는 며칠 후 손발목이 아작나게 된다.
'뉴질랜드 > 남섬' 카테고리의 다른 글
8시간의 밀포드 사운드 (0) | 2019.03.29 |
---|---|
뉴질랜드 속 뉴질랜드, 퀸즈타운 (0) | 2019.03.24 |
빙하와 작별하는 비오는 와나카 (0) | 2019.03.17 |
폭스 빙하에서 캠핑하고 손발목을 잃다 (0) | 2019.03.09 |
빙하 위에서 스카이다이빙하기: 뉴질랜드 프란츠 조셉 빙하 (0) | 2019.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