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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북섬

1박 2일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

by 마리Mary 2019. 2. 14.

 

 

먼저, 뉴질랜드 북섬에 있는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 트랙은 이렇게 생겼다. 타우포에서 차로 30분 정도 걸린다. 오투레레 헛으로 가는 길은 에메랄드 호수와 센트럴 크레이터 사이에서 시작한다. 위 개념도에는 나우루호에 산과 통가리로 산에 가는 길이 표시돼있지만, 지금은 표지판도 없고 나눠주는 팜플렛에도 산을 오른다는 얘기는 전부 삭제되었다. 신의 욕조라는 에메랄드 호수와 블루 레이크에서 수영도 하고싶었지만 수영하지 말라고 써있다. 수영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관광지는 하여간 규제가 생기기 전에 빨리 오는 것이 최고다.

 

크로싱은 누구나 하는 트레킹이지만 그렇다고 캔버스를 신고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물론 트레킹을 하면서 스니커즈 신고 청바지를 입은 사람들도 보였다. 죽지 않은 게 신기했다. 고지대는 추우므로 따뜻한 위아래옷과 방풍방수 자켓을 챙기고 긴 바지를 입는다. 장갑도 있으면 좋다. 햇빛이 강해서 선글라스도 챙기는 게 좋다. 화장실에는 화장지가 없으므로 개인이 쓸 화장지도 가져가야 한다. 짧은 부스트를 줄 말린 과일이나 에너지 바도 챙기면 좋다. 나는 다른 이유로 샀던 바르는 파스를 챙겼다. 무거운 dslr 카메라를 챙길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했지만 그래봤자 별 수 있나. 챙겼다. 구글맵스로 오프라인 지도도 다운받았다. 

 

 

통가리로 크로싱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통가리로 산을 경험할 수 있는 트레킹 트랙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 트랙이고, 두번째는 통가리로 노던 서킷 트랙이다. 알파인 크로싱과 노던 서킷이 겹치는 트랙이 가장 험난하고, 또 가장 아름답다.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은 원래 통가리로 크로싱이 이름이었지만 계속 사고가 일어나서 고산지대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중간에 알파인을 끼워넣었다. 하루 7시간에서 8시간 정도 걸리는 하루 짜리 트레킹 코스이고, 가장 유명하다. 점심과 마실 물 1.5리터 정도를 가져가야 한다. 화장실은 보일 때마다 가주면 중간에 화장실 가고싶어서 위험해질 일은 없을 정도로 넉넉히 마련돼있다. 통가리로 노던 서킷 트랙은 말 그대로 통가리로 산을 중심으로 circuit, 한 바퀴 빙 도는 곳으로 시작한 곳에 도착한다. 보통 3박 4일의 코스로 그동안 먹을 음식을 준비해가야 하고, 머무르는 헛hut을 예약해놔야 한다. 비성수기인 겨울에는 선착순이다. 헛이 아니면 헛 옆에 있는 캠프사이트에서 각자 준비한 텐트를 칠 수 있다. 캠프사이트를 이용하더라도 헛의 조리시설은 사용할 수 있다. 이 조리시설은 스토브만을 말하는 것이고, 조리도구와 커트러리, 컵 등 하여간 스토브를 제외하고 쓸 것들 전부 챙겨와야 한다. 샤워를 하거나 머리를 감을 곳은 없다. 헛에서 머물더라도 헛에는 매트리스밖에 없기때문에 침낭을 챙겨다녀야 한다. 그리고 비성수기인 겨울에는 이 가스렌지도 없다.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을 했지만 20km의 고산지대를 여유있게 걷고 또 좀 더 오래 둘러보고 싶었기 때문에,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 트랙과 가장 가까운 헛인  오투레레 헛oturere hut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크로싱을 마쳤다. 크로싱을 하는 사람들은 타우포에 있는 숙소에서 셔틀버스 픽업을 받고 크로싱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게 보통이다. 하지만 개인차로 시작점에 간다음, 크로싱을 끝마치는 지점에서 셔틀을 짧게 타고 시작점에 내려 개인차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근데 크로싱을 마치고 운전할 여력이 있을 지는 의문이다. 

 

나는 하루를 헛에서 머물기 때문에 돌아오는 날짜를 다르게 예약해야 했는데 인터넷 셔틀 예약 창으로는 날짜를 그렇게 선택할 수 없어서 크로싱을 하기 전날 타우포 아이사이트에 가서 나 내일 크로싱하는데 날짜를 이렇게 저렇게 예약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 자리에서 예약했다. 타우포에서는 꽤 오래 머물렀는데, 북섬에서 남섬으로 가면서 타우포에 들렸을 때 날씨가 안 좋아서 이미 일정이 틀어진 적이 있었고, 남섬에서 북섬으로 가면서 타우포에 들릴 땐 날씨가 좋을 때까지 기다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타우포에 도착하고 다음 날은 비바람 때문에 크로싱이 불가능했고, 그 다음 날이 돼서야 크로싱을 할 수 있었다.

 

아이사이트에서 셔틀버스를 예약할 때 직원이 말하길 게시판에 붙어있는 통가리로 산 날씨 봤냐, 올해도 사람 죽었다, 이건 시간이 없다고 해서 그냥just 하는 활동이 아니다, 너 헛 예약은 했냐, thermal 옷은 있냐, 신발은 무슨 신발이냐 이것저것 물어봐서 많이 빡치긴 했지만 크로싱 전날에 비가 왔고, 크로싱을 원하는 당일은 여전히 추운 날씨였으며 비바람에서 비만 빠졌다 뿐이지 바람이 거셀 예정이었고, 사람이 매년 죽는 건 사실이라 나 떠멀 옷 있고, 신발은 트레킹 슈즈고 빙하에서도 썼다(거짓말)고 차근차근 대답했다. 여전히 미덥지 않은 표정으로 셔틀버스를 예약해준 직원은 픽업장소를 묻고 티켓을 줬다. 티켓을 들고 아이사이트를 나오면서 타우포 isite에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은 뉴질랜드 must-do가 아닙니다. 다른 멋진 트레킹 장소도 많아요.'라고 써붙이는 이유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직원은 셔틀버스 예약해 줬더니 죽어서 돌아오는 관광객을 원하지 않았겠지. 나도 죽어서 한국가긴 싫었다. 배낭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셔틀버스에서는 한 장 짜리 안내서를 나눠주는데, 날씨가 좋지 않거나 크로싱을 할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 어느 포인트에서 몇 시 전까지는 돌아와야 하며, 어느 포인트에서 몇 시에는 출발해야 타우포로 돌아가는 셔틀을 탈 수 있다고 강조의 강조를 해놨다. 주의깊게 읽고 또 읽은 다음 트랙의 시작점에서 내렸다. 트레킹을 시작하는 지점에서는 항상 그렇듯 별다른 감흥은 없고 10분 걷다보면 이걸 왜 한다고 했나 하는 후회가 들기 시작한다. 

 

 

사진은 나우루호에 산이다. 퀸즈타운에서도 느꼈지만 눈덮인 예쁜 산을 볼 수 있는 게 전날 비가 왔을 때의 최대장점이다. 처음 통가리로 크로싱을 하면서 진짜 원했던 건 나우루호에 산과 통가리로 산 정상을 오르는 거였는데, 구글에 물어본 결과 맨 첫 시간인 새벽 셔틀을 타면 둘 중에 하나는 오를 수 있다고 했다. 둘 다 오르고 싶어서 헛을 예약하고 하루 묵은 건데 걸으면서 더이상 두 산 정상을 오르기 싫어졌고 또 두 산의 정상을 오르는 안내판과 트렉도 없어져있었다. 울루루처럼, 신성한 곳이니 오르지 말라는 건 개구라일테고 사고가 너무 많이 나서 없앤 것 같다. 

 

셔틀버스는 트레커들을 망가테포포에 떨군다. 누우루호에 산을 보면서 망가테포포에서 소다 스프링스까지 걷는 게 첫 트랙이다. 여기까지는 길고 지루할 뿐으로 용암으로 새까만 산자락과 그 용암을 뚫고 흐르는 샘물을 보며 걷는 건 간단하다. 소다 스프링스에서 사우스 크레이터까지 가는 게 지옥이다. 이상하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엄청 많이 올라야 하는데 뒷사람이 따라붙어서 너 먼저 가라고 해도 뒷사람이 아니 됐다고 하는 그런 계단이다. Devil's staircase라는 뻔하고 확실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지옥같은 계단을 끝내면 바로 사우스 크레이터의 입구다. 나우루호에 산으로 가는 트랙의 시작점이기도 했지만 앞서 말했듯 이정판 조차도 없어져있었다. 사우스 크레이터에서 레드 크레이터의 시작점까지 가는 곳은 그저 평지다.

 

 

여기는 레드 크레이터로, 사우스 크레이터를 지나면 볼 수 있는 곳이다. 사우스 크레이터 전의 그 계단들을 지옥같은 계단이라고 했던가? 여기서부터가 진짜 지옥이다. 여기서 실족사는 이래서 벌어지는 걸 알았다. 안그래도 전날 비가 와서 흙길이 젖어 미끄러운데 발을 딛는 곳의 바로 옆은 저 아래 낭떠러지, 잠깐 미끌하면 저세상인 곳이었다. 길은 미끄럽고, 가방은 무거워서 휘청이기 쉽고, 가만히 서있기도 힘들게 만드는 바람은 계속해서 분다. 안내서에 크로싱 트랙 중 가장 거친 곳이라고 써있긴 하지만 육체적으로 힘들고 어쩌고를 떠나서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활화산지대를 걷고 있다는 감상도 할 수 없었다. 나, 살아 돌아갈 수 있는 거지? 전날 아이사이트에서 쉼없이 내게 경고하던 직원이 떠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고3때 만난 선생도 생각났다. 고삼 여름방학 특강에서 선택과목 수업을 신청해야 했는데, 내 선택과목 중 하나인 경제는 내 고등학교에 수업할 사람이 없었다. 수능날 경제시험을 볼 사람도 나까지 세 명이었던가. 그래서 자습을 해야 했는데 따로 자습교실을 정하고 감독할 사람도 구하는 등 일벌이기 싫었던 담임은 나보고 그냥 아무 선택과목이나 들으라고 했다. 말이야 방구야? 수업료까지 내야 하는건데. 싫다고 했더니 자기는 모른다면서 특강 담당 선생한테 내가 얘기하라고 했다. 그래서 만나러 갔다. 이런 상황이고 난 자습해야 한다고 했다. 너 뭐 본다고? 경제요. 경제? 되물어보며 날 비웃던 그 표정과 그때의 교무실 앞 공기는 어쩐지 잊혀지지 않는다. 날 지지하는 사람의 표정을 잊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날 업신여기는 자들까지 기억하는 건 도대체 왜일까. 

 

나는 그해 수능에서 경제 50점을 받았다. 전부 맞혔다는 얘기지. 가채점을 하고 50점이란 결과를 봤을 때도 가장 먼저 그 얼굴이 떠올랐다. 누구보다도 확신에 찬 표정으로 나의 실패를 점치던.

 

 

그 예상을 밟아버린 것처럼 이 크로싱도 난 결국 해내겠지. 게다가 그 직원은 걱정과 염려에 가까웠으니. 하지만 그 20분간의 죽음의 산길을 거치고 사진에 보이는 저 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땐 그저 바위에 앉아 쉬어야 했다. 나 뉴질랜더들의 세금으로 헬기타서 구해지는 건 아니겠지?

 

저 정상은 레드 크레이터 정상summit 이다. 정상에 오르면서 여기가 에메랄드 레이크인가? 드디어 산장에서 쉴 수 있나? 간절하게 생각하며 갔지만 에메랄드 레이크는 한참 멀었다. 거대한 크레이터가 화산활동으로 생겼고, 그 중심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 재밌는 일이지만 크레이터 지형은 볼만한 건 없다. 별 볼 건 없는 크레이터 정상에서 내려오면 그 다음은 쉽다(고 생각했다). 레드 크레이터 다음은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의, 노던 서킷의 하이라이트인 에메랄드 호수다. 화산 폭발로 생긴 세 개의 에메랄드 호수 너머엔 블루 레이크가 있는데 크레이터 서밋에서 내려가는 거라 이 블루레이크가 먼저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는 좀 감동적이다. 좌측의 센트럴 크레이터도 넘기면 드디어 에메랄드 호수가 보인다.

 

 

이게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의 대표 얼굴인 에메랄드 레이크다. 유황지대라 이상한 냄새도 많이 난다. 테 푸이아에서 맡았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냄새였다. 에메랄드 레이크는 주변 지열지대의 광물질 때문이다.

 

에메랄드 레이크를 두고 아래로 내려가는 길도 위험한데 단단한 지대가 아니라 모래투성이에 밟으면 푹 꺼지고 작은 자갈에 미끄러지는 길이다. 심지어 바람은 더 강해진 것 같았다. 레드 크레이터를 오를 때는 옆으로 자빠져 머리 깨질 까봐 조심했다면 여기서는 앞구르기하고 바위에 머리 찍을까봐 조심했다. 사진만 빨리 찍고 내려와 에메랄드 레이크 옆에 앉아 싸간 점심을 먹었다. 전날 마트에서 먹을 걸 살 때 손질과일이 할인하길래 샀는데 훌륭한 선택이었다. 아름답지만 절대 뭔가 싱그러운 것이 살 수 없는 곳에서 먹는 생기 가득한 과일은 정말 특별했다. 이 쪽만 보면 황폐한 화산지대와 반짝이는 에메랄드 호수가 이상하게 조화로운 모습인데 바로 옆에는 눈이 쌓여있고 작은 얼음도 돌아다닌다.

 

 

에메랄드 호수에서 블루 레이크로 가는 길과 오투레레 산장으로 가는 길로 나뉜다. 블루 레이크 다음은 크로싱 트랙의 끝으로 완만한 하산길이다. 오투레레 산장으로 가는 길은 오른쪽의 나우루호에 산과 지대에 따라 바뀌는 식생때문에 크게 지루하지는 않았다. 

 

산장에 도착해서 침대를 정하고 방명록에 이름과 그날 잘 침대 번호를 적은 다음, 식사하고 양치하고 잘 준비를 하고 있으면 산장지기가 돌아온다. 산장지기는 내일 날씨와 트랙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해준다. 헛에는 거의 대부분이 통가리로 노던 서킷을 반 시계방향으로 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투레레 헛 다음 일정이 에메랄드 호수인 사람들이 많다. 산장지기 말로는 내일 날씨가 좋기때문에 통가리로 크로싱을 하는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을 것이므로 조용하고 사람 없는 에메랄드 호수를 원한다면 아침 일찍, 적어도 몇 시에는 나가야 할 거라고 했다.

 

 

 

맑은 날 통가리로 산 정상에 서면 저 멀리 타라나키 산까지 보인다던데(근데 타라나키 산은 사우스 크레이터에서도 볼 수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 반지를 버렸다는 운명의 산인 나우루호에 산 정상에서 보는 이곳은 어떨까 엄청나게 멋있겠지. 그거 보려고 산장 예약까지 한건데 헛수고가 됐네. 같은 아쉬움을 날려버리는 석양이 지고 해가 뜨는 나우루호에 산이었다. 날이 좋아져서 그새 눈은 많이 녹았다. 헛을 예약하면서 두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에 집착한 나머지 산의 일몰과 일출을 볼 수 있다는건 잊고 있었어서 더 선물같았다. 

 

 

 

2~3시간동안 걸으면 다시 에메랄드 호수에 도착한다. 같은 길을 다시 걷는 거였는데도 딱히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에메랄드 호수에서 어제와 다른 곳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내 실수는 이틀을 머물면서 물을 1.5리터밖에 가져가지 않은 거였는데, 산장에 물은 끓여먹으라고 돼있어서 아껴마시려고 했지만 산행을 하면서 물을 아껴마시는 건 미친 짓이다. 목말라서 죽기 직전에 마시기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마시지 말라는 시냇물을 떠마셨다. 처음엔 걱정돼서 입에 물칠만 조금 하다가 물통에 채워서 마셨다. 지금까지도 아무렇지도 않아서 다행이다.

 

 

에메랄드 호수를 지나 걷는 센트럴 크레이터다. 산길 옆의 움푹 패인 분지가 센트럴 크레이터고, 저 위의 빨간 봉우리가 레드 크레이터다. 에메랄드 호수는 사진과 너무 똑같았고 길도 위험해서 생각보다 맘에 들지는 않았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지나와보면 저렇게 새빨간 레드 크레이터가 멋있었다. 이 레드 크레이터에서도 등을 돌려 걷다보면 블루 레이크가 있는데 에메랄드 호수에서 점심을 먹는 사람도 많지만 사람이 적고 비교적 평지인 블루 레이크에서 점심을 먹는 사람도 꽤 있다. 블루레이크는 화산 활동 중에 지하수가 흘러들어 온 호수다.

 

 

블루 레이크를 지나면 노스 크레이터의 측면을 돈다. 이제 고된 산길은 끝이고 완만한 길이다. 길도 닦여있고 중간에는 대피소에서 잠깐 쉬어갈 수 있다. 그런데 완만해도 너무 완만하다. 위 사진에서 왼쪽 중간에 보이는 타우포 호수 말고는 볼 것도 없다. 그런데 길은 엄청 길다. 그것도 지그재그로 길어서 헛길 걷는 기분도 든다. 이렇게 길고 재미없고 짜증나는 트레킹은 처음이었다. 근데 이 재미없는 걸 4시간이나 해야 한다. 내리막길이라 무릎에 무리가 오니까 오르막길처럼 막 걷기도 힘든데 재미도 없다. 크로싱을 끝내는 이 길이 최악의 트레킹이어서 가는내내 5초에 한발짝식 내딛어야 했다. 너무 화가나서 욕이 너무 하고싶은데 주변에 사람들은 또 엄청 많아서 누가 나한테 제발 쓰레기처럼 굴어서 입밖으로 쌍욕할 수 있길 바랬다. 사람도 그냥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나는 힘들어서 죽을 거 같은데 이얘기 저얘기 관심도 없는 얘기를 하면서 입을 절대 쉬지않는 사람들에 음악도 스피커로 틀어서 나우루호에 산 정상에서도 들릴 것 처럼 듣는 놈들은 가다가 앞으로 넘어져서 후두엽 깨지길 기도했다.

 

모든 의욕을 잃은 것은 마지막 헛인 케테타히 쉘터를 지나 표지판을 마주했을 때였는데, 이렇게 한참을 내려왔음에도 주차장까지 45분 남았다는 안내를 보고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또 중간에 나무가 무너져서 트랙이 끊겨 다리 아래를 미끄러져 통과해야 했던 길까지 갈수록 모든 것이 날 빡치게 했다. 더이상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던 마지막의 마지막 한 줌 의욕까지 모두 잃고 주저앉아 초콜릿을 까먹었다. 더이상 초콜릿을 먹고싶지 않았지만 살아서 셔틀버스를 타려면 먹어야 했다. 엄청난 화를 느끼며 죽음의 5단계인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 중에서 지금 분노단계에 와있다고 생각했다. 이때까지도 분노하지 않았었다는 걸, 슈가하이와 합쳐진 분노로 그 먼 내리막길을 뛰듯이 경보하며 내려오면서 알았다. 오래전에 날 지나쳐간 사람들을 다시 만나도 인사할 여유도 없이 지나치고 파들파들하는 다리도 무시했다. 썩을놈의 엠앤엠즈 초콜릿이 역류하며 맛본 역겨운 설탕맛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게 내가 초콜릿을 싫어하게 된 이유다.

 

1박 2일의 트레킹을 마치고 타우포로 가는 셔틀버스가 출발하길 기다리며 메모한 건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단 한 문장 뿐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남들 다 하는 트레킹 한 게 뭐가 대견하다는 건지 의문이 들긴한다.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 끝은 끔찍했으나 그만큼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