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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내륙

2019 백제 문화제와 정림사지 5층석탑

by 마리Mary 2019. 9. 29.

애초에 부여에 간 것은 궁남지 포룡정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때에 연꽃은 모두 져버리고 작은 꽃들이 조금 피어있는 정도였다. 햇빛이 아주 쨍쨍한 날이었다. 삼국시대가 생각나는(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난간 낮은 얇고 긴 다리가 예뻤다. 옆에는 그네뛰기를 하는 높은 그네가 하나 있었다. 애들을 동반한 가족 방문객이 많았다. 

 

주변에 맛집이 어디있나 검색하다 찾아간 곳은 솔내음이었다. 부여 떡갈비 집 치면 바로 나오는 곳이다. 1시 반이 넘은 시간에 들렸는데 30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점심시간대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땐 다른 식당을 찾는 건 시간낭비인데, 다른 메뉴를 정하고 식당을 찾는 데 30분은 넘게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웨이팅 자리는 내외부에 충분했다. 30분을 조금 덜 기다려 자리를 안내받았다. 

 

예전에 한국 자전거 국토종주를 하며 체감한 건 전라도 음식은 맛있다였다. 그 맛난 전라도 음식의 첫 시작이 광주송정역 떡갈비집이었다. 그때 그 떡갈비 맛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구례 산수유 마을에서도 떡갈비를 먹었었지만 난 떡갈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멀쩡한 고기를 왜 굳이 다져서 뭉쳐야 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맛있다고 하는 떡갈비는 정말 맛있는 떡갈비다. 다 먹기 전까지는 식지 않도록, 백제의 상징과도 같은 금동대향로의 봉황을 본땄을 작은 화로에 불을 지피고 떡갈비를 서빙한다. 부드럽고 달착지근한 떡갈비도 맛있었지만 포인트는 연잎밥이었다. 향긋한 연잎밥에는 상냥하게도 은행 한 알과 대추 하나에 호박씨, 검은콩, 아몬드 2알이 올라간다. 에피타이저로는 조청을 곁들인 삼, 감자샐러드, 얇게 잘라 바삭하게 구운 연근을 올려 오이와 마요네즈를 곁들인 것 같은 버섯요리가 나오는데 이 버섯요리부터가 훌륭한 에피타이저였다. 연근튀김도 맛있고 간장이 소스인 숙주나물도 맛있었다. 직원들도 친절하다. 전체적으로 좋았던 것은 간이 세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절이가 한 접시 나오는데 파도 매운 기를 확실히 빼고 고춧가루와 식초 정도로만 양념을 해서 먹기 편했다. 평소에 너무 자극적이라 김치를 잘 먹지 않는데, 여기 김치는 배추도 아삭하고 간이나 냄새가 세지 않아서 간만에 김치를 먹었다. 된장찌개도 깔끔하게 개인 대접에 덜어먹도록 국자가 함께 나온다. 양도 많아서 다 먹기 전에 배가 불러온다.

 

부여 솔내음 한우떡갈비 1장, 한돈떡갈비 1장 씩 나오는 연정식, 1인당 19,000원. 2인이상 주문 가능하며 후식으로는 향긋한 연잎차가 비치돼있다. 브레이크 타임은 2시 반부터 5시 반이다. 

 

부여에는 궁남지를 보러 간 거였고, 근처에 맛집이 있다 해서 찾아갔고, 그 바로 옆에서 백제 문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니 백제 문화제에 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행사장에 가면서 음악소리가 들리기에 또 뽕짝의 세계가 열리겠구나 했는데 태평소 소리가 귀를 쨌다. 국악무대였다. 2019년의 백제 문화제는 9월 28일부터 10월 6일에 열린다. 그런데 마침 내가 갔던 9월 29일에 농악경연대회를 열고 있었다. 10시부터 시작해 16시에 끝나는데 내가 갔을 땐 마지막 팀이 공연을 시작했었다. 유치원 때 했던 사물놀이부도 생각나고 재밌었다. 내가 한국인인 걸 느낄 때는 풍물패의 공연에 신나고 태평소 소리에 마음이 동할 때다. 유치원 때 사물놀이부에 나도모르게 큰 감명을 받았던 걸까. 하지만 풍물패는 착장도 이름도 힙하다. 풍물風物, 신바람을 일으키는 물건들. 대부분의 공연이 야외 땡볕 아래라는 것도 애착이 간다. 공연은 죽을 맛이겠지만.

 

부여 시내에서 행사장으로 오면 조각공원이 보인다. 이 조각공원에서 계속 아래로 내려오면 위의 국악 공연을 봤던 주무대가 나오는데, 주무대 뒷편에 구드래 나루터가 있다. 여기서 사진의 황포돛배를 탈 수 있다. 백마강 옛다리를 타고 강 건너편에 갈 수 있는데 백제RPG라는 미션게임 현장접수를 받고 있었다. 그외엔 열기구 체험 말고 딱히 할 건 없다. 열기구 체험은 5시부터 9시까지 가능하다. 가격은 1만원.

 

다시 강을 건너와서, 주무대를 지나면 씨름장과 그네뛰기 2대가 있다. 연날리기를 할 수도 있다. 여기를 넘어오면 소무대가 있는데, 여기서 줄타기를 볼 수 있다. 어린시절 날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렸던 영화 왕의남자에서 배우들 줄타기를 지도하고 줄타기 대역을 섰다는 명인이 30분동안 줄을 탄다. 예전에 각설이패 공연을 보면서 몇 번 봤었지만 어렸을 때라 기억이 희미해서 처음 줄타기공연을 보는 기분이었다. 아니 저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줄 하나 위에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가, 한발로도 갔다가 코도 차고, 심지어 점프해서 앉는 게. 거기에 주고받는 만담과 풍물까지. 백제 문화제는 줄타기만 봐도 성공이다. 꼭 시간을 맞춰가길 추천한다. 팜플렛에 따르면, 공연은 소무대 앞에서 월수목일에는 3시 30분부터, 화금엔 5시부터 시작한다. 이 외에도 볼만할 것 같은 게 불꽃놀이인데 목요일, 토요일엔 밤 10시 20분부터 10분간, 일요일엔 밤 8시 45분부터 5분간 진행된다고 한다.

 

백제는 한반도 문화에서 중요한 만큼 후원을 많이 받았다는게 느껴지는 축제였다. 우선 올해2019가 65회째나 됐다. 팜플렛부터도 보기편하게 만들어놨고 근처 안내소에는 간이 종이썬캡도 배치돼있는데 은근히 유용했다. 부지가 넓지만 쉴 수 있는 그늘막도 많이 만들어놨고 주차장도 많다. 강변 부지라서 직사각형 구조인 것도 복잡하지않아 좋았다. 화장실엔 약하게 냉방도 되고 있었다. 백제로 돌아가는 지역에서 오랫동안 열어온 축제라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잘 정돈되어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 도로 곳곳의 보도블럭이나 맨홀에도 백제 고유문양을 조각해놓는 등의 충실한 컨셉질도 아주 좋았다.

 

우연히 들린 백제문화제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5시가 훨씬 넘어서야 6시에 문을 닫는 정림사지에 들렸다. 정림사지寺址는 정림사寺의 부지址를 말한다. 이곳을 정림사라고 부르지 않고 정림사의 부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정림사가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림사라는 이름도 1942년에 출토된 명문기와에 태평8년(1028년, 고려 현종 19년)이라는 시기와 정림사라는 이름이 써있어 밝혀진 이름이다. 백제멸망으로 소실된 정림사지를 고려가 중건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백제에서 이 절을 뭐라고 불렀는지는 모를 일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6세기 말에 완성되었다. 생긴 것 만큼이나 심플한 이름은 정림사 부지에 있는 5층짜리 돌로 된 탑이라는 뜻이다. 옛날에 정림사지오층석탑을 배울 때 별다르게 여기지 않은 건 사진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평범해보이는 석탑이 국보 9호 씩이나 되고(숫자는 중요한 순서가 아니라지만 국보 3호와 국보 300호 정도는 차이가 있지 않을까), 정돈된 형식미, 세련되고 완숙한 아름다움, 완벽한 구조미를 보여준단 말이 전혀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해가 지는 시점에 정면에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바라보면 그게 무슨 말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정림사가 소실되지 않았다면 이 탑을 작고 볼 것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오히려 황량한 절터의 작은 석탑이 가지는 아우라가 있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정림사지에 새겨진 글자들의 정체였다. 당나라 장수가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그 공적을 새겨넣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백제에서 뭔가 주절주절 써놓은 줄 알았더니 능멸이었다. 그러니까 프랑스를 점령하고 모나리자에 여기 내가 정복함ㅎㅎ 하고 낙서한 것과 같다는 얘기다. 2019 최대의 반전.

 

정림사지 및 박물관 입장료, 1,500원. 입장시간은 하절기 3월~10월엔 9시부터 밤 6시, 동절기 11월~2월엔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입장은 입장 종료 시간 30분 전까지 가능하다. 

 

뒤에 있는 강당에는 정림사지석불좌상이 있다.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 때 세운 보존불로 추정된다고 한다. 머리와 보관은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신체는 형체만 겨우 남아있다. 얼굴부터 왜소한 체형까지 어딘가 이곳 정림사지를 닮았다. 화려하지 않은 보존불과 작은 석탑만이 남아있는 정림사지는 쓸쓸해보이지만 그렇다고 더할 것은 없어 보였다.

 

강당 계단에 앉아 바라보는 석탑이 외롭다. 바라보고 있으니 백제가 한국에서 갖는 의미가 갑자기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귓가에선 낮에 들었던 풍물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