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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내륙

가을의 충남 나들이 - 논산 돈암서원, 모덕사, 관촉사

by 마리Mary 2019. 10. 5.

서원. 한국인으로 한국학교에 다니며 몇번은 들어봤을 단어다. 훈구파와 낑겨보려다 밀려 여기저기 피신한 지방에서 만들고 후학을 양성하였다는 그런 곳.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고 그중 47개가 남아있다. 서원이라 하면 경북의 영주 소수서원,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대구의 달성 도동서원, 경남의 함양 남계서원, 전남의 장성 필암서원, 전북의 정읍 무성서원,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이다. 그런데 이 서원들이 한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유네스코 등재는 24년만이다. 유네스코가 생긴 지 이쯤됐으면 각국에 있는 웬만한 건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묻어두자.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된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한다.

 

이날 방문한 돈암서원은 위 9개 서원들 중 가장 늦게(1634년) 건축됐다. 서원 앞의 흰 꽃밭이 소담스럽고 예쁜 곳이었다. 이날은 이때까지만 해도 하늘이 맑고 깨끗했다. 여름의 끝자락에 방문했지만 날이 선선한 가을에 나들이로 들르면 좋을 곳이었다. 오후 3시쯤에 도착했을 때는 커플 하나밖에 없었는데 4시쯤 되니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원은 작은 편이고, 서원이란 게 건축물로서 엄청나게 뛰어난 가치가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서 돌아보는 데에 1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래도 한국의 단청은 보고있으면 귀여운 맛이 있다. 특히 이 서원엔 단청의 끝에 빨간 꽃이 그려져있어서 더 눈에 띄었다. 또, 대청마루에 앉아 쉴 수 있게 해놔서 좋았다. 평범한 기와집과 이런 문화유적이 단청을 빼면 별다른 차이가 없는 만큼, 이런 한국 전통 건축물을 보면 옛날에 자주 놀러가던 할머니 집이 생각난다. 기와집이었는데 큰 대문을 지나면 길을따라 요즘은 정말 보기 힘든 채송화가 피어있었고, 작은 대문을 지나면 넓다란 대청마루가 눈에 띄었다. 작고 좁은 돌계단을 올라 대청마루의 기둥에 기대 앉아있거나 뒷문으로 나가 내 주먹보다 큰 비에 젖은 수국을 구경했다. 흙마당에선 고추도 말리고 자전거도 탔다. 옆 공터엔 움직이는 걸 본 적이 없는 경운기가 잠자고 있고 반대쪽엔 우물펌프가 있었다. 기와집 뒷편엔 뒷산이 있었다. 겨울이면 뒷산에서 고구마도 굽고 밤도 구웠다. 자고 갈 때면 한밤중에 밖에 나와있는 화장실에 가기 무서워 꼭 옆자리 사촌을 깨워 함께 갔었다. 장마철엔 대청마루에서 기와에서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방울을 구경했다. 기와가 파인 부분에서만 떨어지는 물방울 때문에 딱 그 곳들만 동그랗게 파여있는 흙바닥을 기억한다.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선 지도 벌써 오래전이다.

 

그러니까, 한국의 절을 비롯해서 이런 기와집을 보면 일단 기분이 편안해진다. 그리고 마루에 한번은 앉아있고 싶어진다. 이날은 날이 맑다가 갑자기 비가 추적추적 오기 시작했으므로 더더욱 그랬다. 

 

다음으로는 모덕사에 갔다. 절 이름 치고는 특이한 이름이다 생각했으나 절 사寺가 아니고 사당 사祠였다. 모시는 대상은 면암 최익현이었다. 모덕은 고종이 최익현의 덕을 흠모한다고 보낸 편지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최익현은 을사조약이 체결됐을 당시 을사 5적 처단을 주장하고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됐고, 유배지에서 단식하다 사망했다. 사이즈가 참 아담한 것 치고는 유명한 인물을 모신 곳이라 입구 쪽엔 언제 누구누구가 왔었다는 이력이 주루룩 적혀있었다.

 

모덕사에는 살았던 고택과 장서각, 전시관이 있다. 상당히 작은 곳이지만 작은 전시관이 꽤 재밌다. 게다가 위인을 모셨다는 곳이라서 그런지 아주 좋은 자리에 위치해있다. 앞엔 저수지가 있고 뒤로는 나지막한 산들이 늘어서있다. 굉장히 평화로운 분위기다. 게다가 사람이 실제로 살았는지 콘센트도 설치되어있고 때묻은 듯한 흔적이 많아서 더 옛날 그 기와집이 생각났다. 가장 안쪽에 사당이 있는데 양옆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어 경치가 정말 좋다.

 

모덕사 근처에 관촉사(이번엔 寺.) 바로 옆에 있는 돌채라는 식당부터 가서 저녁을 먹었다. 한정식을 먹었다는 블로그 리뷰는 좋았는데 꽤 오래전 리뷰여서 전화해보니 영업한다고 했다. 가봤더니 규모가 많이 작아진 모양이었다. 콩나물밥을 메인으로 팔고 있었다. 한정식은 하지 않고 갈치정식은 하고 있어서 갈치정식을 먹었다. 표고버섯에 계란물을 입혀 지진 요리하고, 돼지고기 주물럭 스러운 요리가 먼저 나왔다. 표고버섯은 왜 이제껏 표고버섯을 이렇게 먹지 않았나 생각이 들게 맛있었고, 오리주물럭이나 제육볶음 같은 요리를 정말 좋아하지 않는데도 정말 맛있게 먹었다. 맵지도 않았다. 갈치도 바삭바삭하게 구워져서 맛있었다. 오랜만에 먹는 생선이어서 더 맛있게 먹었다. 밥 반 공기를 더 먹고 있는데 후식이라고 포도 한 송이를 나눠주셨다. 관촉사 입구에서 옆에 난 작은 길로 따라가다 보면 콩나물밥 한다고 큰 플래카드를 걸어놓은 좀 허름한 1층짜리 식당이 있다. 큰 흰색 고양이가 산다.

 

마지막으로 관촉사에 들렸다. 입장료는 원래 1,500원인데 6시가 넘어서 갔더니 매표소가 닫혀있었다. 

 

안에 불교 서적인가가 보관돼있는 곳이라고 했다. 짧은 기둥 끝과 벽에 조각된 연꽃무늬가 세심하다.

 

부지와 절 자체는 정말 작았는데 이 거대하고 요상한 은진미륵 때문에 평범해보이지는 않는다. 거대하긴 한데 얼굴도 큰지라 엄격한 부처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면류관 스러운 2겹의 관을 머리 꼭대기에 얹은 건 이상하고 낯설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고려시대 최대의 석조미륵보살입상으로, 37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예전엔 보물이었다가 2018년에 국보로 승격되었다. 바로 앞의 석등도 볼만하다.

 

사진 속 건물이 큰편인데 작은 금좌불 세 개가 모셔져있고 천장에 학 다섯 마리가 그려져있었다. 저녁에 타종소리를 듣다가 내려왔다.